열두 장면으로 보는 영화의 역사

공간의 리듬(조형미술)과 시간의 리듬(음악과 시)이 탁월한 조화를 이룬 새로운 예술이라고 영화이론가 리초트 카누드(이)가 말했다.

불과 150여 년의 짧은 역사에서 영화라는 장르는 인간의 문화생활을 지배할 정도로 발전했다.

에디슨이 만든 키네토스코프는 작은 구멍으로 움직이는 이미지를 구경하는 장치로 한 번에 한 명만 볼 수 있었다.

에디슨, 뤼미에르 영화 기차 도착

이후 루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가 영화 시대를 열었다.

1895년 11월 28일 파리에서 ‘기차의 도착’이라는 영화로 실제로 기차가 달려오는 것 같아 관객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소동도 있었다.

1908년 : 폼페이 최후의 날(이) 1915년 : 국가의 탄생 1919년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독)

한국영화 100년사 1901년 미국 여행가 버튼 홈즈 일행이 제물포에 입항해 서울의 이모저모를 촬영했고 고종의 사촌이 영사기를 빌려 고종에게 상영했다.

홈즈 일행 서울 시가지 촬영

1903년 한성전기회사가 활동사진을 일반인에게 입장료를 징수해 보여주었습니다.

동대문발전소-한성전기회사

1907년 : 단성사 출현 2충 건물에 350석 규모, 우미관(1910년), 조선극장(1922년)~1923년 : 극영화 월하의 맹서, 그 이전에는 주로 연극과 짧은 영상의 결합물~1924년 : 장화홍련전(순수한 조선자본의 기술과 인력만으로 촬영) 1926년 : 아리랑(나운규 주연) 광복 이전까지의 최고 히트작

1928년:김·유 영의 방랑,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의 계급적 불평등을 영화에 주입, 1932년:임시 주고 1930년대 후반 들어 일제의 탄압으로 영화는 암흑기 1940~45년:군용 열차, 지원병 등 일제의 선전용으로 이용된 1946년:광복 후 일제의 암흑기에서 벗어나고 처음 제대로 된 극영화를 만든 사람은 친일 선전 영화의 선두에 선 최·성인규의 자유 만세, 그리고 KBS라디오 어린이 드라마를 영화화한 반 공편 영화”톨톨”이 등장한 미술 신· 산 옥 1950~53년;조선 전쟁 중 대구에서 15편이 제작된 주로 서부 전선, 낙동강, 성불사 전쟁 기록 영화 1956년:자유 부인 1955년:이·규화은 감독의 “춘향전”서울 국도 극장에서 개봉 2개월간 20여 만원 동원.이때부터 국극과 창극 및 연극이 지배하던 대중 오락의 주도권이 영화로 옮기게 된 계기 1957년:5월 도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 영화제에서<시집 가는 날>이 희극 영화 상 수상.건강한 웃음을 앞세운 덕분에 사전에 동남 아시아 수출 계약

조근하 감독, 도금봉 주연 <황진이>: 필름 유실 산적의 딸 1961년: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라는 광고 문구 아래 신상옥 최은희 커플 <성춘향>과 홍성기 김지미 커플의 <춘양전> 10여일 간격으로 개봉되며 당대 최고의 금독과 배우들의 한판 승부. 결과는 송춘향 압승 서울에서 38만 동원, 이 기록은 1967년 <미워도 다시 한 번>까지 7년간 유지-국민배우 김승호 주연의 <마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상 수상

동촌유원지와 K2 공군기지 신상옥 감독 신영균 주연 ‘빨간 목도리’ 공군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제작비 500만원(당시 보통영화 1200만원) 관객 25만명, 조니 브라더스가 주제가를 불렀다.

빨간 목도리라는 하늘의 남자, 하늘의 남자는 빨간 목도리…… 1964년: 신성일 데뷔작 ‘맨발의 청춘’ 1965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동촌유원지와 K2 공군기지 신상옥 감독 신영균 주연 ‘빨간 목도리’ 공군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제작비 500만원(당시 보통영화 1200만원) 관객 25만명, 조니 브라더스가 주제가를 불렀다.

빨간 목도리라는 하늘의 남자, 하늘의 남자는 빨간 목도리…… 1964년: 신성일 데뷔작 ‘맨발의 청춘’ 1965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로카르노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지만 들은 적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고 세상을 놀라게 했다.

칸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할 영화 부문에 선정. 한국 영화 70년 사상 처음으로 국제 경쟁 영화제에서 거둔 “수확 한국 영화 100선”에 늘에 등재되는 절제된 언어와 영상미로 예술을 보이고 준 새 지평을 열었다.

효성 여대(현 대구 카토 클릭 대학)미대 교수였던 배·욘균이 각본, 촬영, 조명, 그리고 편집까지 혼자 북 치고 오랜 푹 영화였다.

기획 기간을 제외하고 제작에 무려 4년이나 걸렸다.

로승 혜곡(노·승헤곡)와 동부 자승(통쟈승)혜진이 말을 대사에 관계 없이 시각적 체험을 그린 선불교를 그렸다.

주로 안동 봉정사에서 촬영. 달마는 인도의 불교 승려로 중국에 와서 불교를 전수한 승려이다.

가정에 무서운 모양의 둥근 섬의 모습이 보인다.

본래의 얼굴은 준수하고 있었지만 스님이 길에서 죽은 구렁이를 보면 몸 안에 들어 운전하고 정리하고 집에 가면 자신의 육체는 어디에도 없는 대신 추한 육체 옷이 남아 있다.

자리를 뜨다 사이에 낮은 수준의 험한 도사가 준수한 육체를 보고마음이 당황하고 변질시킨 것이다.

대사가 할 수 없이 두고 간 추한 육체를 사용한 게 오늘에 이른다.

1993년:서편제소리꾼의 애환을 그린 영화 그들의 모습을 아름답고 가련하게 그렸다.

청산도 전 샌드)에서 다듬어진 밭가를 걸으며 진도 아리랑을 부르는 5분 10초의 “Long Take”은 한국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장면이다.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여기를 보려고 청산도에 갔다.

판소리에 대한 관심과 단성사에서 공개되면서 6개월 상영 100만 관객 동원 1999년:쉬리 한국형 블록 버스터 탄생.블록 버스터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서 흥행에 성공한 것을 뜻한다.

제작비 30억 620만 관객 동원, 강·제규 감독, 한·솟큐 주연 이후 실미도 태극 거사 등 대작 붐이 이어졌다.

2002년:취화선 칸 국제 영화제 감독상 수상, 임·곤테쿠 감독 조선 말기 화가 장·승화 오프의 일대기.이후 실미도(실미도, 04)에서는 처음 1000만 관객 동원, 정·도연의 밀양(밀 양(07)~09년:워낭 소리독립 영화가 인기가 없다는 통설을 깨고 292만명 동원. 경북 봉화(쿄은상북도·봉화)산골의 노인과 소의 40년 우정을 그린 것으로 감동적이다.

주인공의 노인, 소 함께 세상을 떠난 2014년:명랑하고 명량 해전을 그린 채·박민식 주연, 1700만 관객 동원. 이순신의 리더십을 펼쳤다고 평가되고 있다.

2017년:옥 저 영화관의 아성에서 벗어난 영화, 넷플릭스가 600억원을 전액 지원. 한국 영화관은 보이콧했다.

이후 인터넷을 통한 영화 시대가 열린다.

김·성훈 감독의<Kingdom>이 코로나에서 영화관이 불황에 빠질 때 역시 인터넷 영화에서 세계적 히트 2020년:파라사이토 반 지하의 가족 아카데미 상 수상 폰·주노 감독한국 영화사에서 춘향에 관한 영화가 1923~2010년까지 총 18편으로 가장 많은 영원한 주제이다.

74년도부터 2014년 사이의 영화는 거의 관람한 것 같다.

학창 시절 가난한 대학생이 본 영화는 주로 거리의 영화관에서 내 돈 250원을 내고 개봉관의 만경관에서 처음 본 영화는 To sir with love였다.

당시 시내 버스 학생 요금이 6원인가 10원이어서 1개월 간 교통비인 셈이다.

기타, 의리의 사나이, 오른 팔 등 1,2번 입장한 적이 있지만 친척이 대신 표를 사준 것이다.

중학생 시절에는 벤·하, 칵다그라 등 문화 교실로 명명된 10원의 영화인 시골 초등 학생이 생애 처음으로 본 영화는 교실의 칸막이를 제거하는 커튼을 닫아 본 심청전이다.

앞으로 영화는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할까?한국 문화 산업은 더 발전할 수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삼국 유사 등에서 보이고 주는 한국적으로 세계적인 다양한 Motive가 매우 많다.

대구 은행 발간”향토와 문화 97권”참조(2021.3.24)